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공화국 (문단 편집) === 제2차 연립정부 === 7월 위기는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1차 연립정부는 정책 수행 동력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총리인 [[게오르기 리보프]]는 사퇴했고 입헌민주당은 내각에서 이탈했다. 사퇴한 리보프를 대신해 사회혁명당 소속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총리로 선출되었고, 좀 더 많은 [[멘셰비키]]계 인사가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케렌스키 역시 러시아 민중들의 바람과는 달리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1917년 7월에는 1차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케렌스키 공세]]라고 알려진 대규모 공세를 지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하였다. 종전을 염원하는 병사들과 민중들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강행한 이 공세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케렌스키에게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한다. 케렌스키는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외교적 책무를 위해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우리가 여기서 전쟁을 포기하면 [[프랑스]]와 [[영국]]이 우리에게 지원물자를 보내지 않아서 안 그래도 무너진 경제가 더 무너진다!"라고 반협박에 가까운 호소까지 했지만, 지칠대로 지친 민중들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총 맞고 죽으나 굶어 죽으나~~][* 더군다나 당시 각지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이라며 노동자들의 참전 거부와 혁명을 위한 조국의 패배를 호소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계열은 반대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호소하는 모습이 벌어졌다. 이러한 차이는 기존에도 있었던 [[공산주의]] 계열과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갈등이 격화된 주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이미 일선의 병사들과 후방의 민중들은 전쟁을 수행할 의지를 상실했고, 의지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 능력도 떨어져 있었다. 1917년 가을이 되면 비공식적으로 200만 명 이상의 [[러시아군]] 병사가 [[탈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볼셰비키]]는 7월 위기로 인해 [[블라디미르 레닌]]이 잠적[* 사실은 가발 쓰고 면도한 채 핀란드로 피신했음.]하고 [[레프 트로츠키]]가 체포되어 수감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 타격은 금세 회복되었다. [[까가 빠를 만든다|8월에 들어가면 당원이 위기 이전의 3배가 될 정도였다.]] 볼셰비키는 민중과 병사들에게 '토지, 평화, 빵'을 약속했고, 반대로 민중의 의지를 거슬러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던 임시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만다. 공세의 실패로 케렌스키의 지도력은 크게 상실되었고, 특히 군부에서는 케렌스키에게 크게 실망했다. 1917년 8월에는 보수파였던 육군 참모총장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의 명령을 사칭해 반동 쿠데타를 일으켰다. 케렌스키는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고, 군부의 신망을 잃어 쿠데타를 진압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비에트에 손을 내밀었다. 케렌스키는 트로츠키 등을 석방하고 레닌의 수배령을 철회했다. 또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눠주어 도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임시정부나 케렌스키가 아닌 노동자 스스로를 위하여 코르닐로프를 막아낼 것을 주장했다. 결국 쿠데타는 막을 수 있었지만 쿠데타 진압의 공로자는 누가 봐도 케렌스키나 임시정부가 아닌 일반 노동자들였다. 비록 이후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직을 케렌스키가 겸직했지만 군대가 자기들 찍어누른 케렌스키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들은 무기마저 가지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